교회를 다니게 된 후 사후세계가 천국과 지옥으로 나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렇게 믿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자주 봤다. 나는 ‘모태신앙’ 이다. 하지만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하다가 결국 내린 답이 성경에 있는 ‘구원’인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이 책을 읽게 됐다.
2015년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본격적으로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무엇을 위해 사는건지, 우리는 왜 여기와있는 건지, 죽음이란 무엇인지, ‘존재’에 대한 물음들은 자주 나를 괴롭혔고, 가끔은 잠자다 말고 유튜브 검색창에 이상한 철학적 질문을 던졌다. 책도 참 많이 읽었다.
어릴때 부터 교회에 다니다가 3년 전 부터 그만뒀다. 종교란 결국 인류 역사상 아무도 명쾌히 풀어내지 못한 ‘삶과 죽음에 대한 물음’을 알고자 하는 needs에 대해 가장 그럴듯한 solution을 제공한, 역사적으로 제일 크게 성공한 business 사례라고 봤다 _ 내 공간이니 불편함과 논란을 감수하고 솔직히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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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 년간 고민해본 결과, 생명과 인류의 본질에 대해 그럴듯한 답을 준 사람은, 지금까지는 다윈인데, 그의 이론을 전제로 한 많은 책들을 읽어본 결과 단세포 유기물의 아주 오랜시간 동안의 진화, 자연선택, 그리고 인지혁명 등에 의한 인류 문명의 탄생이 내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스마트폰과 컴퓨터까지 설명을 가능하게 하니까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좀 찝찝하긴하다. 그럼 죽으면? 생물학적인 접근으로는 어떻게 인류가 여기까지 왔는지는 설명이 가능하지만, 죽으면 어떻게 될지에 대한 물음에는 결국 답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왜 사는가?’ 혹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에 대한 질문은 덮어주고 ‘어떻게 살까?’ 에 대한 질문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 2019년이었다. 왜 사는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결정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아무도 풀지 못한 문제들을 자기만의 언어로 풀어내기 위해 노력한 책의 저자가 존경스럽다. 진리에 대한 집착, 거대한 담론도 기꺼이 뱉어내야 하는 담대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저자처럼 아주 단단하게 자기만의 답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공부하고, 고통받았을까. 과연 범인이다.
다만, ‘진리’에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자유롭지 않았고, 인생 자체가 허무했다는 저자의 경험에는 별로 감동하지 않았다. 거창한 철학적 물음이 아니라도, 도저히 답이 잘 안나오는 문제들이 하루에도 여러번 나를 괴롭힌다. 왜 ‘존재에 대한 질문’이 이런 다른 질문보다 고귀한가? 그 질문을 풀었을 때 나를 이유없이 미워하는 친구의 친구가 주는 고통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결국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서 자유로워 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나는 이런 핑계로 ‘존재에 대한 물음’에서 도망쳐나왔다.
결국 살아감은 아주 작은 사건들의 연결과 같다. 시작과 끝은, 그리고 삶과 죽음은 시간이 주는 착시일 수도 있다. 그냥 현재를 살고 그 안에서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주변사람들을 사랑하면 그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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